'현재 나의 인생은 내가 선택해 온 의사결정의 합이다.'
예전엔 이 문장을 참 좋아했다.
마치 인생이 한 판의 비장한 체스 게임 같아 보이기도 하고,
내가 내린 선택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말이 꽤 멋지게 들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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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즘 문득, 이 말이 조금 서글프게 느껴진다.
곱씹을수록 어딘가 석연치 않다.
중요한 글자 하나가 빠진 것만 같다.
그 찜찜함을 풀기 위해, 습관처럼 숫자로 생각을 끄적여 본다.
만약 인생이 정말 '합(Sum)'이라면 계산은 너무나 단순하고, 또 잔인해진다.
잘된 선택은 양수(+), 후회되는 선택은 음수(-)라고 치면,
처음 어떤 선택으로 **+4**만큼의 성취를 얻었다.
기분 좋은 시작이다. 하지만 다음 선택은 뼈아픈 실수였고,
내게 **-4**만큼의 결과를 안겨주었다.
그럼, 두 번의 치열한 선택을 거친 내 인생의 합은 얼마일까?
단순 계산으로 **+4와 -4를 더하니 '0'이 된다.**
이 논리대로라면 내가 했던 그 모든 고민과 밤잠 설치며 했던 노력은,
서로가 부딪혀 상쇄되어 사라져 버린다.
성공과 실패를 온몸으로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 '0'이라니.
덧셈으로만 바라보니,
과거의 실수가 현재의 성취를 상쇄시켜 무(無)로 돌리는 것 같아 억울하기 짝이 없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생각하다가,
문장 속에 생략되었을지 모를 한 글자가 머리를 스쳤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은 내가 선택해 온 의사결정의 **집**합이다.'
그래, 덧셈(Sum)이 아니라 **집합(Set)**이었다.
수학 시간에 배웠던 그 집합 기호 `{ }`를 대입하니 그제야 앞뒤가 맞는다.
덧셈의 세계에서는 +4와 -4가 만나면 0이 되어 소멸하지만, 집합의 세계에서는 다르다. 내 인생은 **{+4, -4}**가 된다.
여기에 또 한 번의 좋은 선택(+9)을 더한다면? 덧셈이라면 결국 9만 남겠지만, 집합으로서의 내 인생은 **{+4, -4, +9}**가 된다. 어느 것 하나 사라지지 않고, 오롯이 내 안에 원소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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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이제 이것을 경험이라고 부른다.
경험은 상쇄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의 '집합' 속에 남아,
나라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역사를 구성하고 있었다.
결국 지금까지 수많은 선택을 해온 나라는 사람은,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긴 나열로 표현되어야 맞다.
**나 = {+4, -4, +9, -7, +7, ……, n}**
내 안에 박힌 마이너스(-) 숫자들.
예전엔 이것들을 지워버리고 싶어 안달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것 또한 나를 구성하는 유일무이한 조각이었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모양은, 그 삐죽거리는 마이너스 조각들로 인해서 만들어진
나라는 사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다.
AI 시대가 가속화 될수록, 각자가 가진 경험이 중요하다고 체감한다.
특히나, 글이나 이미지, 영상으로 명문화되지 않은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들 말이다.
AI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해
가장 효율적인 정답을 내놓는 데 선수다.
효율을 찾는 건 이제 AI가 나보다 훨씬 잘한다.
하지만 AI가 절대 학습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바로 내가 겪은 '비효율'의 시간들이다.
효율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겪은 실패(-4)나 방황(-7)은 제거해야 할 오차이거나 낭비된 시간일 뿐이다.
하지만 집합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비효율적이었던 시간 속에 AI는 결코 알 수 없는 맥락이 숨어 있다.
데이터로 기록되지 않은 미묘한 감정,
실패했을 때의 씁쓸한 입맛, 다시 일어설 때 느꼈던 그 떨림 같은 것들.
이것들은 인터넷 어디에도 텍스트로 존재하지 않기에,
오직 그 시간을 통과한 내 안에만 '감각'으로 남아 있다.
![[Blog_20251204_DataThink.jpg]]
남들이 보기엔 낭비였을 그 시간들이 사실은,
나만의 고유한 알고리즘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정답만 콕 집어내는 AI는 흉내 낼 수 없는,
성공과 실패가 뒤섞여 만들어낸 나만의 시선.
그건 경험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선물이지 않을까.
그러니 이제 내 인생의 오답 노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한다.
비록 당시에 최적의 답을 내리지는 못했을지는 몰라도,
그 과정을 지나가는 것 자체도 오롯이 경험의 영역이다.
이룬 결과보다, 이루어 가는 과정의 경험이 더 중요해진 세상.
나만의 이 복잡하고 울퉁불퉁한 집합이,
꽤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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